Church Vision: 교회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

1.Church Vision은 “교회의 꿈”입니다

저는 중학교 2학년 때 부모님께서 사 주신 “아인슈타인 전기”를 읽고 저도 훌륭한 물리학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당시 제가 수학이나 과학을 좋아하였던 것도 아니었고 소질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창피한 말씀이지만, 당시 수학이나 과학 성적은 100점 만점에 50점을 겨우 맞는 낙제 수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아인슈타인과 같은 물리학자의 꿈을 가지게 되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없게도 제 생일이 아인슈타인의 생일과 같다는 사실과 아인슈타인도 학창시절에는 낙제점을 받을 정도로 성적이 좋지 않았다는, 그 이유라고 말할 수 없지만, 나름 공통점(?)을 발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물리학자가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니까,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되고 싶었고, 더 나아가서 한국인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도 받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그 황당한 소원은 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렇게 재미없었던 수학과 과학이 조금씩 재미있게 되었고, 당연히 수학과 과학의 성적도 좋아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는 아직까지 그 황당한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제 인생에 있어서 앞으로도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황당한 꿈이 시발점이 되어서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하여서 제 인생을 만들어 가셨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시절에 누구든지 꿈을 가지게 되고 꿈을 꾸는 것처럼 교회도 꿈을 가지고 꿈을 꾸어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100점 만점에 50점에 불과하지만, 교회공동체가 한마음을 가지고 함께 Vision을 품을 때 Church Vision으로 가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2. Church Vision은 그 지역교회의 존재의 이유를 말해줍니다

1990년대 초 중반에는, 많은 기업들이 2000년대, 즉 21세기와 연관시킨 Vision을 강조하였습니다. 가장 인기 있는 것 중의 하나는 “21세기 초일류 기업”이었습니다. 가끔씩 이러한 기업 Vision은 너무 허무맹랑해 보이기도 하지만, 기업 Vision은 해당 기업들에게 꿈을 제공합니다.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삼성그룹은 비록 한국 내에서는 굴지 대기업이었지만, “세계적 기업”이라거나 “초일류 기업”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기업 Vision은 그 회사에게는 꿈을 제시하였고 현실을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물론, Church Vision이 기업Vision과 똑같은 차원일 수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될 것입니다. 지역교회가 대형교회나 Mega Church가 되기 위해서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Church Vision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Church Vision은 그 지역 교회에게 꿈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Church Vision은 그 지역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 그것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마 28:19-20, 새번역)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지상 대사명”을 우리 교회에 맞추어 감당하는 것입니다. 


3. 나의 사랑, 나의 고민: 두 켤레의 구두

청년시절에 어느 교회 집사님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집사님께서는 신앙이 좋은 분이었고, 교회에서 많은 분들로부터 존경 받을 뿐만 아니라 사업도 열심히 잘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인 사업가들은 항상 두 켤레의 구두를 가지고 살아. 하나는 교회에서 신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업을 위한 것이지. 성경말씀대로 하면 어떻게 사업을 할 수 있겠어? 그러다가 망하기 딱 맞지.”

저는 이 집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과연 그럴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대로 사업을 했다가는 망하고 마는 것인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 안에서만 효력이 있는 것일까?”라는 너무도 많은 질문과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그 후로 “말씀과 삶”이라는 Issue는 저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크고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도 그 집사님의 이야기, “두 켤레의 구두”와 “성경말씀대로 살다가는 망하기 딱 맞지”라는 말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 말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 확인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집사님 말씀대로 정말로 그 대가는 혹독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직장생활을 해보고자 하는 저에게는 많은 불이익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그러한 불이익과 시련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많은 불이익과 시련 속에서도 함께 하기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평안함과 위로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주변의 사람들도 저를 신뢰와 믿음으로 대하여 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4.나의 사랑, 나의 고민: 교회 공동체

청년들을 전도하다가 보면, “하나님을 믿지만, 교회에 출석하지는 않을 겁니다.” 내지는 “교회에 출석하는 대신, 인터넷으로 설교말씀을 듣고 있습니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곤 하였습니다. 이 말들의 요지는 하나님을 믿지만 교회 안으로 들어오고 싶지는 않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일까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최근 교회 지도자들의 실망스러운 모습들이나 교회가 세상 가운데 선한 영향력은커녕 오히려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또 한 가지 이유로는 신앙생활에 대한 오해에서 오는 현상이 아닌가 합니다. 즉, 신앙을 오직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로만 바라보는 시각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구원과 영생을 이세상을 떠나게 될 때, 천국으로 가기 위한 Ticket정로로만 이해하는데 그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롬 10:10, 새번역) 물론,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은 신앙생활의 출발점인 것이지, 믿음의 완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로 인한 영적 회복과 이로 인한 받은 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이제는 교회 공동체에서 나누고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의미의 믿음이고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마음껏 말씀과 삶을 나눌 수 있는 영적 가족공동체이자 믿음의 교회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야 가야 하는 것입니다


5.나의 사랑, 나의 고민: 사영리

제 조카가 고등학교에 다닐 적에 조카에게 사영리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조카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겠냐고 물었고, 제 조카는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조카를 위하여 영접기도를 해 주었고, 제 조카는 그렇게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후에 저와 저희 가족은 미국으로 오게 되었고, 제 조카를 자주 만날 기회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새롭게 그리스도인이 된 제 조카를 제대로 Care해 줄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15년가량의 시간이 지나가게 되었고, 작년 봄에 제가 한국을 방문하였다가 결혼을 앞두고 있었던 제 조카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 조카는 한 대기업의 감사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고, 몇 년 내에 무슨 자격증을 취득하겠다는 등 앞으로의 청사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제 조카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고, 지역교회의 주일예배나 모임에 출석하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유는 직장생활이 너무 바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사영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영접하게 하는 것은 참 좋은 전도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데서 끝날 것이 아니라 지역교회로 연결되어서 공동체 안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새가족들이 교회 안에서 마음껏 말씀과 삶을 나눌 수 있는 영적 가족공동체이자 믿음의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야 가야 하는 것입니다.


6.교회는 가족입니다

한 때 많은 교회에서 “가족 같은 교회” 또는 “가족 같은 교회 만들기”와 같은 말들을 유행처럼 사용하곤 하였습니다. 이런 표현은 지극히 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런 말들이야 말로 교회의 핵심과 특성을 잘 나타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말에는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족 같은 교회” 내지 “가족 같은 교회 만들기”라는 말은 “비록 교회는 가족이 아니지만 마치 가족과 같은 분위기로 만들기”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교회는 엄연히 가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가족이 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엡 2: 19, 새번역)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 같은 교회”가 아니라 “교회는 가족”인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교회가 꼭 물리적인 가족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들끼리만 모이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먼저, 교회는 영적인 가족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교회는 가족과 가족들이 모인 확대 가족이 되어야 합니다.


7.교회를 떠나는 아이들을 어떻게 붙잡을 것인가?

요즘은 한국교회건, 미국교회건 청소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추세입니다. 이 문제를 숫자로 보게 되면 보다 심각성을 느끼게 됩니다. 미국교회 기준이기는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소년들이 자기교회를 떠나는 비율이 90%에 이른다고 합니다. 정확한 통계자료는 없지만, 아마도 한국교회도 비슷한 추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미국교회라는, 특별히 대형교회의 좋은 교육환경과 Program들 그리고 훌륭한 교육 System 속에서 자라나고 신앙생활을 한 아이들이 왜 교회를 떠나는 것일까요? 반대로 말하자면, 완벽에 가까운 교육환경이나 Program, 교육자재들만으로는 그 아이들을 만족시킬 수 없는 그런 무엇인가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반면에 정말 흥미로운 통계자료가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비록 미국교회 기준이기는 하지만, 청소년들이 자기들의 부모를 제외한 최소한 5명의 자기교회 어른들과 이야기를 나눠 본적이 있다면, 그들은 자기교회를 떠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사실 저부터 우리 교회 청소년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갖지 못했습니다. 그럴 만한 이유야 많겠지만, 가장 그 근본적인 이유는 이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에 대한 그 심각성을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교회는 가족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들의 이모, 고모, 삼촌, 아저씨,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8.교회가족은 민 낯을 보여줄 수 있는 관계입니다

어느 신혼부부의 젊은 아내는 매일 아침마다 남편보다 먼저 일어나서 화장을 하고 남편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 남편이 하도 궁금해서 자기 아내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왜,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화장을 하는 거요?” 그러자 그 젊은 부인이 “당신에게 화장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요.”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이 젊은 부인의 갸륵한(?)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지만, 결혼한지 20년이 넘은 저로서 부부라는 것이 늘 그렇게 아름답고 좋은 모습만을 보여 줄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 안에서는 갸륵하고 훌륭한 모습보다는 오히려 부족하고 모자라고 흉한 모습까지도 보여주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서로 이해하고 감싸주는 관계입니다.

교회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잘 포장되고 보여줘도 좋은 모습만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에게 좀 부족하고 못난 모습을 보여 줄 수도 있는 것이고 이러한 모습들 때문에 서로에게 실망하고 토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쁠 때 함께 기뻐하고 슬플 때 함께 울어주는, 늘 함께 하고, 늘 그 자리에 있어 주는 것이 바로 가족입니다

또한, 우리 생명샘 가족들 간에는 사소한 기도제목도 나눌 수 있어야 하고 함께 중보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기도제목을 나눈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소한 기도제목까지도 나눠야 하나?” “괜히 이런 기도제목 나눴다가 말만 도는 것은 아닐까?” “뭐 저런 기도제목까지 나눠?” 처음부터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를 위하여 최소한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9.가족은 그저 함께 있어서 좋은 사이입니다

지난 주일 저녁에는 생명샘 작은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비록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하지 못했고, 거의 즉흥에 가까운 음악회였지만, 아름다운 가을저녁에 꼭 맞는 음악이 어우러진 시간이었습니다. 특별히, 이혜민 자매의 설명으로 비교적 우리에게 낯설게만 느껴졌던 Jazz 음악을 이해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 생명샘 가족들이 그 음악회를 위해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모두 참여하였다는데 더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그야 말로 준비를 하는 시간은 마치 잔칫집 분위기였습니다. 정성껏 간식을 준비하시는 생명샘 가족들, 아기자기한 Table 보를 놓고 의자를 정리하는 손길들 등등

이외에도 “생명샘 작은 음악회”라고 예쁘게 글씨를 써서 붙인 손길, 나름 새롭게 놓아본 의자배치도 신선하였습니다. 오케스트라도 공연할 수 있을 정도로 정열을 다해서 음향장비를 Setting하는 모습과 음악회가 끝나고 늦은 시간까지 정리하는 모습들까지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모두가 기쁨으로 참여해 주신 생명샘 가족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또한, 치열했던 준비의 시간들이 끝내고, 청중이 되어서 진지하게 음악을 들어 주시고, 열심히 박수를 쳐주신 우리 생명샘 가족들과 나눔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급하게 참석해 주신 나눔가족들까지…… 비록, 세련되고 화려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저 작은 음악회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 했고, 함께 그 자리에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가족은 그저 함께 있어서 좋은 사이입니다. 교회는 가족입니다.


10.가족은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는 무대의 장입니다

저희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처음으로 Violin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Violin 연주는 고사하고 제대로 소리를 낼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저희 아이가 연주회를 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찌감치 아내와 함께 아이를 데리고 연주회 장소로 갔습니다. 

그 곳에서는 어린 아이들로부터 어른들까지 저희 아이의 Violin 선생님의 모든 문하생들이 각각 독주무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어른 연주자로부터 어린 학생들까지 혼신을 다한 무대가 계속되었습니다. 마지막은 가장 어린 연주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종이 Box에 나무 막대기를 붙여서 만든 모형 Violin을 들고서 Violin을 연주하는 Pose를 몇 번 취하고는 마치 대단한 Violin 독주라도 한 것처럼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자, 거기에 모인 청중들은 – 물론, 학생들의 부모님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 모두가 일어서서 박수와 함께 환호성을 보냈고, 그 어린 아이는 의기양양하게 무대에서 내려왔습니다. 그 아이가 무슨 Professional 한 연주를 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박수와 환호를 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내 아이, 우리의 아이였기 때문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교회 가족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잘 할 수 있어야만, 잘 할 수 있는 사람만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는 것이고, 교회는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는 무대의 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박수와 환호할 수 있는 모습이 바로 교회가족인 것입니다. 교회는 가족입니다.


11."Being”과 “Doing”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웰빙”이라는 말이 열풍처럼 사용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정확한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웰빙”이 “Well-being”이라는 영어단어에서 나오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비로서 “웰빙”이라는 정확한 의미를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Being”은 “존재” 또는 “존재하고 있는”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웰빙”을 굳이 직역하자면, “잘 존재해 있는” 내지는 “잘 지내는”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이렇듯 “Being”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저 “Being”하는 것에 대해서 불편해하고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Being”보다는 오히려 몸이 조금 힘들더라도 “Doing”을 택하고 더 좋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특별히 가족 안에서는 “Doing”보다는 “Being”이 훨씬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부모님이 무엇을 잘 해주어야만 부모님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아이들도 무엇을 잘 하기 때문에 자녀가 될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해야 하고, 만들어 내고 해야만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저 함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랑하고 사랑 받을 수 있는 것이 교회 가족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거하는 것처럼, 우리 교회 가족 공동체 안에서 거하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가족입니다.


12.예수님이 중심이 되는 Pizza나 Pie 구조의 교회

전통적으로 우리의 사회구조는 Pyramid 모양의 구조를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군대 조직구조는 전형적인 Pyramid 모양의 구조를 통한 상명 하달 구조입니다. 또한, 일반 기업들도 효율성이라는 이유를 들어서 이러한 Pyramid 구조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러한 Pyramid 구조가 익숙하고 편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많은 교회들조차도 이러한 Pyramid 구조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담임목사, 안수집사, 서리집사, 성도들을 Pyramid 구조 안에 두고 각각의 계층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Pyramid 구조가 효율성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또한Pyramid 구조는 보이지 않는 계층으로 인한 권위주의, 일방통행적 의사전달, 그리고 과정을 무시한 성과와 결과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를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구조의 교회를 만드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

그것은 Pizza 또는 Pie와 같은 구조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Pizza 또는 Pie와 같은 구조는Pyramid 구조처럼 상하의 수직구조가 아니라 모두가 같은 수평구조인 것입니다. 다만, 그 기능에 따라서 다르게 역할분담을 할 뿐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중심에 계시고, 그리고 각각 기능에 따른 사역팀들과 목장들과 각종 모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가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