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가치 (Core Value)


1.개요
누군가 "생명샘 교회의 중심가치나 목회철학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할까요? "중심가치"나 "목회철학"하면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까? "동양철학? 서양철학? 목회철학?" 아니면, "나와 아무 관계없는 철학?" 그것도 아니면, "다른 교회들도 다 있으니까, 우리도 있어야 하는 Accessary 정도?"
사실, 저부터도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는 Church Vision이나 Church Mission에 비해서 중심가치에 대한 개념이나 필요성,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였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교회사역을 위하여 Church Vision이나 Church Mission과 함께 꼭 필요한 것 정도로만 생각하였을 뿐이지 그 실체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어쩌면 중심가치는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Church Vision이나 Church Mission보다 더 중요하고, 없어서는 안될 Guide Line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 드릴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자면, 중심가치는 하나님의 말씀의 기반 위에 모든 교회 공동체가 동의하고, 이 교회 공동체를 이끌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샘 교회의 중심가치는 6가지로 압축할 수 있겠습니다. "정직성, 자발성, 가족중심, 열린마음, 과정중심, 삶의 현장중심" 한 마디로 줄이자면, "정직하고 자발적인 가족은 열린 과정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중심가치는 그리스도께서 머리 되시는 우리 생명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생명을 살리고 관계를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2.정직성 - 1
"정직"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나 선생님들로부터 수없이 들어 왔던 말씀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직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사람들은 하루 평균 1.5회의 거짓말을 한다고 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처음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도 10분만에 거짓말을 3번이나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이렇게 거짓말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어른이 되면서 어릴 적에 부모님이나 선생님들로부터 들었던 말씀과는 다르게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정직할 경우에는 많은 손해나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몸소 경험하면서 체득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격려하거나 위로하기 위한 선한 거짓말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를 들자면, 건강하지 못한 친구를 위해서 건강해 보인다고 한다든지, 비록 잘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었지만 잘 어울린다고 말해준다든지, 비록 내 입맛에 맞지 않지만 맛있게 먹었다고 감사의 말을 하는 경우 말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다른 지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이 우선입니다. 그렇지만, "정직"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단기적으로는 손해를 보는 것 같고 온갖 불이익을 당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이는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3.정직성 - 2
요즘은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점점 숫자에 민감하고 예민하게 변해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숫자에 밝아야 출세할 수 있다."는 말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 보니, 이전에는 숫자화 시킬 수 없었던 영역조차도 마치 유행처럼 숫자화 시키고 계량화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Stress 지수, 인성지수, 영양지수 등등 그 수를 셀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숫자에 민감해지면서 또한 그만큼 실적과 결과에 예민해지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만족할 만한 숫자가 포함된 실적이나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매달리게 만드는 식인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매출실적, 영업이익실적, 가입자실적 등등에 사활을 걸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이렇듯 숫자를 포함한 결과와 실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반대로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그 과정이나 수단은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것입니다. 그래서, 실적이나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당연히 정직하지 못할 수 있다든지 내지는 꼼수를 사용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일도 정당화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 문제는 이런 결과지상주의가 교회 안에서, 교회사역에서도 동일하게 용인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라면, 좀 정직하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얼마나 대단한 실적을 달성했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얼마나 더 정직하였느냐는 것입니다.

4.정직성 - 3
얼마 전 어느 Tennis 경기에서 상대방의 선수가 친 공에 대해서 비록 심판은 "Out"을 선언하였지만, 정직하게 "In"이라고 했다가 오히려 정작 본인은 그 경기에서 지고 말았던 일이 있었습니다. 과연, 이 일이 쉬운 일일까요? 물론,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지극히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또한 누구나 해야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 저도 "그 선수의 입장에 있었다면, 경기에서 질 것이 뻔한데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일단, 경기에서 이기고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 무조건 이겨야 하는 승부의 세계에서 그리고 승리로 말하는 Sports의 세계에서 정말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흔히들 하는 말로 "강한 사람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논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만연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교회에서도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무리 세상이 타락하였고, 아무리 교회가 세속화되었음도 하나님의 교회로서 그럴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 교회에서는 어떻습니까? 조금 극단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다른 교회야 어떻게 되든지, 남이야 손해를 보든지 말든지 일단 우리 교회만 좋으면 된다는 생각이 난무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샘 교회는 비록 지더라도 비록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한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5.정직성 - 4
요즘 "응답하라 1988"처럼 지난 시간들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들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그 때는 정말 그랬지."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특별히, 요즘은 너무 흔하다 못해 어린아이들도 하나씩 가지고 있는 휴대폰이지만, 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휴대폰은 그만두고 "삐삐"도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1992년에 대학을 졸업하였고, 그 해 결혼과 동시에 서울의 한 기업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사무실에 전화기는 있었지만, 아내에게 전화하는 제 개인적인 용무 때문에 공무용이었던 사무실 전화기를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적인 용무로 전화할 때마다 Building Lobby로 가서, 거기에 있었던 공중전화기를 사용하곤 하였습니다.         
어느 날 당시 제 직장상사가 근무시간에 어디를 그렇게 자주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 상황을 설명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런 제 답변에 황당해 하면서, 제가 전화를 걸더라도 별도로 추가 요금을 내는 구조가 아니니까, 그냥 사무실 전화를 사용하라고 하였습니다. 오히려, 제가 전화 때문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더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정직의 문제를 나 자신에게 적용하는데 있어서는 아무리 엄격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기준이 남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어떤 상황 가운데 있는지, 왜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충분히 알아보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자기중심적으로 율법을 해석하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였던 바리새인처럼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6.정직성 - 5
사무엘하 11장에서, 다윗 왕은 밧세바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뒤에 밧세바가 임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황한 다윗 왕은 전쟁터에서 나라를 위하여 용감하게 싸우고 있었던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급하게 불렀습니다. 그리고, 먹을 것을 함께 보내면서 집에 가서 푹 쉬라고 하였습니다.   
다윗 왕이 우리야에게 이렇게 한 것은 밧세바가 남편 우리야를 통하여 임신하게 된 것처럼 속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충성스러운 우리야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동료들을 생각했을 때, 자기자신만 편안하게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다윗 왕은 다음 날 다시 우리야를 불러다가 이번에는 잔뜩 술을 마시게 한 다음에 다시 집으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우리야는 역시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윗 왕은 우리야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우리야를 전투가 가장 치열한 전선으로 앞세우고 나아갔다가 죽게 하도록 하였습니다.  
결국, 다윗 왕은 자기의 죄를 부정직한 방법으로 덮으려고 하다가 더 큰 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윗 왕의 계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너는, 어찌하여 나 주의 말을 가볍게 여기고, 내가 악하게 여기는 일을 하였느냐?" (삼하 12:9)고 말씀하시면서 다윗 왕의 죄를 드러내셨습니다. 정직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지름길인 것입니다.

7.자발성 - 1
제가 신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가장 신기하게 생각하였던 것은 저뿐만 아니라 신학교에 올 정도라면 뻔하게 다 알았어야 할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학생들은 정말로 다양하고 많은 질문들을 쏟아낸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질문을 들으면서 "아, 저런 생각을 할 수도 있었구나" 또는 "저게 왜 궁금한 거야?"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반면에 저를 비롯한 우리 한국학생들은 - 물론, 언어의 장벽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 그렇게 자유롭게 질문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어쩌면, 질문 그 자체보다는 "내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또는 "다른 학생들은 어떻게 여길까?" 하는 것이 더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문화적으로 겸손의 미덕을 강조해왔습니다. 그래서, 늘 암묵적으로 먼저 남을 의식해야 하고, 나의 생각과 태도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수업시간에 질문을 하면서도, 그 질문을 듣게 될 교수님과 다른 친구들이 그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여길까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자발성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명령을 해서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해서 자기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입니다. 자발성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자유의지인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가지게 된 성품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발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8.자발성 - 2
청년시절에 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동기동창이면서 동시에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도 함께 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는 자기를 청년부 회장으로 추천해 달라고 저에게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친구는 저에게 한가지 시나리오를 알려 주었습니다. 
내용인 즉, 먼저 제가 그 친구를 청년회장으로 추천하게 되면, 그 친구는 자신도 진심으로 청년부 회장직을 맡고 싶지만, 개인적인 사정과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서 제 추천을 사양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럴지라도 저는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서 자기를 청년부 회장으로 추천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친구의 제안대로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청년부원들도 그 친구가 들었던 개인적인 사정과 여러가지 자기가 청년회장이 될 수 없었던 이유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가 청년회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결국, 그 친구는 그해 청년부 회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정서로는 자기자신이 직접 Leader가 되겠다거나 일을 해보겠다고 나서는 행동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람은 겸손하지 못하다는 생각과 편견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자발성은 그 사람이 더 많은 책임감을 가지게 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람에 대한 신뢰와 지지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9.자발성 - 3
몇 년 전 제가 잘 알고 지내던 집사님께서 부친상을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가족들이 함께 그 집사님과 가족을 위로하였습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그 집사님은 교회식구들에 대한 감사와 천국으로 가신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서 주일예배에서 그 집사님의 아들과 함께 클라리넷을 연주하게 되었습니다.   
그 집사님 아들의 클라리넷 연주는 무척 수준급이었습니다만, 그 집사님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집사님 아들의 연주 실력은 아버지의 부족함을 덮고도 남았습니다. 비록, 연주 곡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클라리넷을 연주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모든 교회가족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렇게 감동적이었던 연주는 그만 아버지의 클라리넷에서 나는 "삑" 소리와 함께 위기를 맞을 뻔 하였습니다. 하지만, 역시 수준급이었던 아들의 클라리넷은 아버지의 실수를 덮었습니다. 그러나, 연이어 계속되었던 아버지 클라리넷의 "삑, 삑" 소리에 그만 아들의 입에서는 웃음이 터졌고, 그 바람에 더 이상 연주를 계속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엄숙한 분위기 때문에 간신히 참고 있었던 교회가족들도 결국 모두 함께 웃음을 터뜨리면서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실수한 아버지를 비웃지 않았고, 또한 연주하다가 웃어버린 그 아들을 비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아름다움이었고, 사랑이었고, 감동이었습니다.

10.자발성 - 4
저는 다른 지역교회에서 섬기는 청년들을 만날 기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청년들이 교회 일 때문에 지쳐 있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작은 교회의 청년들일수록 그 정도가 심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작은 교회일수록 젊은 청년들이 1인 2, 3역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청년 한 사람이 찬양 팀원으로 섬겨야 하기도 하였고, 동시에 주일학교 교사로서 주일학생들을 돌보아야 하기도 하였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교회 홈페이지를 만들고 관리하기도 하였고, 또한 교회청소와 같은 힘을 써야 할 일이 있으면 도맡아서 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젊은 청년들의 헌신은 교회 공동체를 풍성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것이고, 가치 있는 소중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청년들의 헌신이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외적인 압력이나 압박감 내지는 분위기에 못 이겨서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것이라면, 그 청년들이나 교회 공동체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헌신은 자발적인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서 자신의 것을 공동체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내어놓는 것이 공동체를 위해서나 본인 자신을 위해서도 중요한 것입니다. 섬김은 자발적으로 성경적인 가치를 기반으로 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교회 공동체와 지체들을 사랑하는 마음의 열매로서 나타나게 될 때 보다 의미 있는 일인 것입니다.

11.자발성 - 5
한국에서는 야외예배나 수련회를 준비할 때, Game이라든지 연극이라든지 Workshop이라든지 되도록이면 많은 Program들을 빡빡하게 준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Group이나 조를 편성한다든지 많은 상품과 경품을 준비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정신 없이 모든 Program에 참여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 마치 주목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잠깐이라도 참여한 사람들이 아무 것도 안 하고 있거나 잠시 쉬기라도 하게 되면 무슨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철저하고 꼼꼼하게(?) 준비를 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반면에 우리 생명샘 교회의 야외예배나 수련회는 Program이 거의 없거나, 설령 있다손 치더라도 느슨하기 그지 없습니다. 오히려, 오래 간만에 일상을 벗어 나서 가족들과 목장식구들과 차 한잔을 두고 한가로이 이야기하는 여유를 즐기는데 의미를 두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생명샘 교회의 여유로움이 더 좋습니다.   
교회 일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합니다. 좀 잘 안 돌아가는 것 같고, 돌아가더라도 체계적이지 못한 것 같고, 진행속도도 느린 것 같고 그렇더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자발적으로 헌신할 때 그것 때문에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지난 주일부터 경건이가 자발적으로 Drum을 치게 되었습니다. 제가 힘들지 않냐고 했더니, 힘들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재미있다고 했습니다. 저도 기뻤습니다. "경건아, 고맙다."

12.가족중심 - 1
저희 가족이 Oklahoma에 살았을 때 한 1년정도 미국교회에 출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Oklahoma에서 두 번째로 큰 교회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모든 System이 잘 갖춰져 있는 교회였습니다. 어른들은 11시 예배를 드리고, 이어서 12시부터는 Small Group으로 모일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Small Group들도 나이 별로 – 예를 들자면, 30대 초반 Group, 30대 후반 Group, 40대 초반 Group 등 이런 식으로 세분화되어 있었습니다. – 또는 International Group 등과 같은 식으로 되어 있어서 원하는 곳으로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저와 집사람은International Group에 합류하였고, Member들은 따듯하게 저희 부부를 맞이하여 주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이들도 역시 11시부터 어린이 예배에 참석하여 예배를 드리고, 이어서 12시부터는 어린이 Small Group에 참여하여서 성경공부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잘 갖춰진 성경공부 Program뿐만 아니라 합창과 같은 특별활동을 위하여 몇 주 동안 열심히 연습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매주 주일 오전에 아이들을 어린이 예배에 보내고 난 다음에는 일절 교회에서 아이들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이산가족이라도 된 것처럼, 어른들은 어른들 대로, 아이들은 아이들 대로, 열심히(?) 살다가 집에 가는 차 안에서야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좋은 System도 좋고, 훌륭한 Program도 좋지만, 교회가 그것도 주일날까지 이산가족을 만들고 있다는 것은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 아닐까요?

13.가족중심 - 2
정확한 출처를 기억할 수는 없지만, 한국 교회들도 그렇고, 미국 교회들도 그렇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90%의 청소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고 합니다. 굳이 출처를 찾을 필요도 없는 통계자료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한국 교회나 미국 교회를 막론하고, 어느새 교회 안에서 청소년들의 숫자가 줄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역시, 정확한 출처를 기억할 수 없지만, 그리고 비록 미국 교회의 통계자료이기는 하지만, 자기들 부모님을 제외한 5명 이상의 교회의 어른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던 청소년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청소년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많은 교회 Program에서 – 큰 교회들의 세련된 주일예배나 작은 교회의 소그룹 모임들을 포함해서 – 어른들과 아이들 내지는 어른들과 청소년들이 함께 모여서 참여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Program이 비록 체계적일지는 모르지만 오히려 교회 안에서 세대를 가르는 주범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의 온 가족 예배는 의미 있는 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이번 부활 주일을 앞두고 주일학교에서는 어른들과 청년, 청소년,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이 참여할 수 있는 Program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Program도 참여하고, 아이들과도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또한, 이번 기회를 계기로 해서 우리 어른들도 청소년들과 아이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4.가족중심 - 3
많은 전문가들은 이 시대를 "포스트 모던" 시대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포스트 모던" 시대는 모든 것이 해체되는 시대라고 합니다. "절대적"이라는 말은 어느덧 진부한 생각 정도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윤리도 상대적인 개념으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가장 타격을 받은 것이 바로 가족입니다. 많은 가족이 해체되고, 많은 가족들 안에는 상실감과 혼돈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깨어진 관계로 살아가지만, "우리는 괜찮아"라고 적당히 가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록, 물리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이미 정서적, 정신적으로 해체되어 있는 가족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러한 해체 문화로부터 안전한 곳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불편한 모습들을 "거룩함"이라는 말로 가리고, "우리는 괜찮아"라는 인상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정신적, 물리적으로 해체된 가족들을 회복하도록 도와주고, 또 그렇게 회복된 가족들은 다른 가족들을 돌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족의 회복과 건강한 가족은 교회를 세워가는 가장 중요한 부분인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Program이라 할지라도, 가족의 건강성을 해치는 요소가 있다면, 그 Program을 과감하게 재검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어떤 Program을 만든다고 할지라도, 가족의 건강성을 증진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가족이 교회의 기초 단위이기 때문입니다.

15.가족중심 - 4
제가 청소년 시절을 보내는 동안, 비록 가출을 감행(?)한적은 없었지만, "우리 부모님과는 말이 안 통해."라는 불평을 하곤 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 저와 저희 부모님은 모두 한국에서, 한국의 문화 속에서,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말이 안 통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 저와 부모님이 말이 안 통했던 것은 또한 사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은 부모님의 생각 속에서 부모님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저에게 말씀하셨고, 저 또한 제 생각 속에서 부모님의 말씀을 전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민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 부모님들과 아이들은 말이 안 통하는 환경 속에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한국 문화와 한국어가 더 편한데 반해서, 우리 아이들은 미국 문화와 영어가 더 편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부모님들은 아이들과 이렇게 말이 통하지 않는 상태로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 부모님들이 생업과 집안일로 바쁘고, 아이들도 공부로 바쁘더라도, 서로 시간을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자면,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은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우리 부모님들은 마음을 열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부모님들이 그 주간에 읽었던 성경말씀이나 지난 주일 설교 말씀을 함께 나누는 것은 어떨까요?

16.가족중심 - 5
제가 전에 사역하였던 교회는 온 가족이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릴 뿐만 아니라 성경공부도 그런 식입니다. 물론, 유초등부 어린이들은 별도로 모이지만, 6학년부터 청소년들은 자기들의 부모님들을 포함해서 다른 어른들과 함께 소그룹 성경공부에 참여합니다. 처음 교회를 시작한 이래로 12년동안 이러한 방식을 유지해오고 있습니다.
성경공부 방식도 인도자가 일방적으로 성경 지식을 전달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그 날의 성경 본문말씀을 함께 읽고 나면, 인도자가 그 성경말씀 안에서 몇 가지 Issue들을 찾아서, 문제제기를 합니다. 그러면, 각자가 그 Issue들을 가지고 자기의 생각을 나누고 토론하는 방식입니다. 
물론, 어른들이나 부모님들만 토론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참여한 아이들도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되묻기도 하고, 자기들의 의견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처음에 그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른 별에서 왔다고 해야할까요? 참신하다고 해야할까요?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면서 무릎을 치게 만들곤 합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어른들과 토론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이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하면, 혹시라도 감추고 싶은 집안 이야기를 꺼낼까 봐서 긴장한 부모님들은 아이들의 말을 막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느덧 감추고 싶은 집안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그 순간부터, 아이들도 부모님들과 어른들과 자연스럽게 토론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17.열린 마음 - 1
제가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였던, 90년대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90년대 초반에는 "세계화"라는 말이 화두였다면, 90년대 후반에는 "IMF 사태"라는 국가적인 위기 속에서 그 화두가 "구조조정"이라는 말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누구 라고 말할 것도 없이 "변화"를 말하였고, 또 강조하였습니다. 
이러한 시류 속에서 "가족만 빼고, 모든 것을 다 바꿔라."라는 말을 유행처럼 하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말처럼 모든 것을 다 바꿨을까요? 물론, 그동안 많은 것들을 꿨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렇듯 모든 것을 바꾸는 것을 좋아하는 것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미 자기들에게 익숙한 것에서 편함을 느끼고, 그래서 바꾸는 것보다는 그동안 익숙한 것에 머물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이미 자기들에게 익숙하게 된 것들, 이미 자기들의 것들을 포기하지 못하고 오히려 지키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단순히 개인적인 습관이든지, 아니면 사회적 동의가 필요한 문화든지 기존에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것을 지키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고,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의 본질 위에 있다면, 기존의 것과 다르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고, 불편하더라도, 무조건 거절하고 거부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18.열린 마음 - 2
제가 어릴 적에 "산울림"이라는 Rock Band가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Member가 모두 3명이었는데, 이 사람들은 모두 친형제들 간이었습니다. 아무튼, "산울림"이라는 Rock Band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아니 벌써……" 어쩌고 저쩌고 하는 노래였습니다.
Radio나 Cassette Tape을 통해서 그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어른들께서는 "무슨 노래가 그러냐? 노래가 왜 저러냐?" 하시곤 하였습니다. 물론, 어른들의 이 말은 단순히 궁금해서 물어 보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전통 가요에 익숙해져 있었던 어른들의 입장에서 그 노래는 그분들이 알고 있었던 "노래"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어른들은 기존의 노래와 전혀 다른 노래에 대해서 "다르다"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저건 틀렸다. 그러므로, 저건 노래가 아니다."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저는 그런 어른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막상 제가 그 어른들의 나이가 된 요즘에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저도 그때의 어른들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동안 익숙한 것에서 편함을 느끼는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존과 다른 것을 대하게 되었을 때, "다르다."고 인정하기보다는 "틀렸다."고 치부해 버리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열린 마음은 비록 기존의 것과 다르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고, 불편하더라도, "그건 틀렸다."는 말로 거절하기 보다 오히려 "나와 다르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19.열린 마음 - 3
한 10년 전쯤 Oklahoma에서 제일 큰 교회를 방문해서 예배를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우선, 큰 교회건물 안의 예배당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현대식 건물의 예배당 안에는 넓은 무대와 번쩍번쩍하는 조명 아래서, Drum과 Bass Guitar를 포함해서 전자 악기들을 가지고, 한번도 들어 본적도 없는 찬양을 인도하는 찬양팀에 압도될 지경이었습니다.     
옆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도 마치 잘 아는 찬양인양, 자유분방하게 찬양을 따라 부르면서 그 찬양에 몰두하는 모습에서 또 한번 압도되는 느낌이었습니다. 마지막 곡은 찬송가였는데, 비록 영어가사로 찬송가를 불러야 하였지만, 처음으로 아는 곡이 나왔다는 안도감에서, 너무 반갑기도 하였고, 그래서 눈물이 찔끔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어릴 적 드렸던 전통적인 예배와는 전혀 다른 형식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Drum은 고사하고 예배시간에 감히(?) Guitar도 칠 수 없는 분위기였습니다. 정장 위에 Gown을 입고 근엄하게 찬송가를 인도하시던 성가대 지휘자와, 역시 양복과 정숙한 Dress로 말끔하게 차려 입고 엄숙하게 찬송가를 부르시던 집사님들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런 방식은 맞고, 저런 방식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좀 전통적인 방식에서 편함을 느낄 수도 있고, 반대로 자유로운 형식으로 예배할 때 더 예배에 몰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열린 마음은 "예배는 엄숙해야 한다." 또는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게 예배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뛰어 넘어서, 다양한 의견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20.열린 마음 - 4
몇 년 전에 "그리스도인의 재정원칙"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기억나는 부분은 "열린 원"과 "닫힌 원"에 관한 비유입니다. 이 책 저자에 의하면, 어떤 사람들은 재정에 대한 예산이나 계획을 세우지 않고, 상황과 주변환경에 따라서 그때그때 재정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재정습관은 마치 "열린 원"과 같아서, 아무리 많은 재정수입이 들어와도 그 "열린 원"의 열린 부분으로 계속해서 빠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재정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재정에 대한 예산과 계획을 철저히 세우고 재정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상황과 환경에 그렇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닫힌 원"과 같아서, 원이 닫혀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재정이 허투루 빠져 나가지 못하고, 따라서 비록 적은 재정수입에도 불구하고 재정이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재정에 관한 이 책 저자의 "열린 원"과 "닫힌 원"에 관한 비유에 대해서 저는 개인적으로 깊이 공감합니다.            
그렇지만, 이 비유의 방향을 우리의 사고방식으로 조금 바꿔 본다면, "열린 원"은 그야말로 "열린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사고나 전통적인 방식의 원 내지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렸다."라는 생각의 원을 열 수만 있다면, 나와 다른 다양한 생각과 의견을 그 원의 열린 부분으로 자유롭게 들락날락 하도록 하면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열린 마음이 아닐까요?

21.열린 마음 - 5
작년 가을이었나요? "응답하라 1988"이라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쌍문동 어느 동네를 배경으로 고등학생이었던 주인공들과 가족들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였습니다. 주인공 아이들끼리는 물론이고, 그 가족들까지 마치 친족관계라도 되는 것처럼 어울려서 음식을 먹고, 정을 나누는 장면을 보면서 "그때는 그랬지"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제가 어릴 적만 해도 정말 그랬습니다. 우리 동네 누구네 집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누구네 할머니가 어디가 아프신지, 그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다 아는 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새 동네는 아파트로 바뀌어 갔고, 아파트라는 환경은 물리적으로 이웃들을 더 가깝게 만들었지만, 아파트 문만 닫으면, 누가 이웃인지조차 모르게 만들었습니다.   
요즘에는 교회에서 가족들의 기도제목을 나누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그 집 아이들에 관한 문제나 부부 간의 문제를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될 수도 있고, 이는 사실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기문제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하는 경향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는 자신의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고, 다른 사람들의 기도와 도움을 통해서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라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고, 이것을 용납 받고 치유하는 것은 영적 성숙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입니다. 이를 위해서라도, 우리 모두가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22.과정중심 - 1
우리나라 속담들을 보면,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속담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꼭 필요한 지혜를 더해 주기도 합니다. 그러면,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는 속담은 어떨까요? 이 말은 사람들이 일을 이뤄 가는 과정에서 최선책이 쉽지 않을 경우 차선책을 선택하는 것도 좋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만, 이 의미를 조금 삐딱하게 보자면, 그 차선책이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없는, 그래서 불의한 방법이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물론,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과 관계없는 삶을 사는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불의한 차선책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답은 명확합니다. 불의한 차선책을 선택하면 안됩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차선책을 선택하지 않았다가는 시간적으로나 금전적으로 큰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럴 경우, 그 차선책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전 4:12, 새번역) 그렇기 때문에, 우리 생명샘 가족들은 서로서로에게 세 겹줄이 되어 줄 수 있도록 격려하고 권면해야 합니다.

23.과정중심 - 2
누구든지 비슷한 경험이 있겠지만, 제가 한국에서 미국으로 처음 왔을 때 가장 먼저 했던 일 중의 하나는 운전면허 시험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과정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간절한 바람과 기도에도 불구하고 첫번째 실기시험에서 그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주일 뒤에나 다시 시험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시험에 떨어졌다는 창피함 보다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Ride를 부탁해야 한다는 미안함이 앞섰습니다. 그런데, 당시 매일 저를 학교까지 Ride해주시던 분이 다른 도시에 가서 다시 시험을 신청하면 일주일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속으로는 썩 내키지 않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날로 다른 도시에 가서 운전면허 시험을 신청하였습니다. 하지만, 시험은 커녕 운전면허 시험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제가 같은 날 실기시험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결국, 저는 Penalty를 받고서 그후로 3주동안 시험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미국에 온지 한달이 되어서야 운전면허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비록,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이 일을 통해서 한 가지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일이든지 아무리 결과가 좋더라도 그 과정이 좋지 못하다면, 그 일을 하면 안된다는 교훈입니다. 교회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하나님이나 교회를 위해서 아무리 좋은 결과를 가져올 일이라고 하더라도 편법을 사용하거나, 과정이 하나님의 말씀의 기반 위에 있지 않다면, 그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4.과정중심 - 3
요즘에는 어디를 가든지 "효율"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리고, 효율을 중요시 합니다. 그렇다면, "효율"은 무슨 뜻일까요? "효율"이라는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들인 노력과 얻은 결과의 비율"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Input 대비 Output의 비율입니다. 그래서, "효율"이라는 말은 자연스럽게 Output을 강조하고, Output에 더 관심을 가지게 합니다.   
그런가 하면, "효율"이라는 말과 가끔 혼돈해서 사용하는 "효과"라는 말은 어떨까요? "효과"라는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목적을 지닌 행위에 의하여 드러나는 보람이나 좋은 결과"라는 뜻입니다. 결국, "효과"라는 말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과정에서 보람을 느끼고 또한 그로 인해서 좋은 결과를 가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결과"나 "Output"을 무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하지만, "결과"나 "Output"의 바로미터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Output을 단순 수치로 정량화 하기 보다는 "내가 얼마나 더 용납할 수 있는가?" "얼마나 더 포용하고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정성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효율"을 강조하다 보면, 결과, 그 중에서도 수량화된 Output을 자꾸만 강조하게 될 것이고, Output을 위해서 그 과정은 무시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높은 Output을 위해서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관계없는 편법을 사용한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결과를 위하여 함께 기도하고 마음을 모으는 그 과정 또한 그 결과만큼이나 중요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효율"보다 "효과"가 더 의미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25.과정중심 - 4
제 주변의 많은 분들은 그저 막연하게 과학은 어렵고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어떨까요? 뉴튼이라는 분은 우연히 사과나무 아래에 누워있다가 떨어지는 사과에서 영감을 얻어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역사상 가장 천재 중의 한 사람, 아인슈타인도 대학에 떨어져서 재수를 했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이런 분들은 그저 천재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근현대 과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분들입니다. 그야말로, 근현대 과학은 이러한 걸출한 천재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발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만일 이런 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과학기술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즘에는 어떨까요?  
요즘에도 위대한 업적을 인정받고, 노벨상을 수상하는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사실, 이분들의 개인적 능력이나 역량을 따진다면, 뉴튼이나 아인슈타인보다 탁월하다고 할 수 없지만, 그 업적은 뉴튼이나 아인슈타인 못지 않습니다. 이 분들의 업적은 개인의 능력에 의존하기 보다 Team을 만들고, Team Work를 통해 이루어진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사역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저는 훌륭한 천재나 탁월한 Leader 한 사람보다 평범하지만 마음을 모으고 함께 하는 사람들의 Team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을 모으고 하나되고자 하는 그 과정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 자체가 의미 있고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이고, 서로 다른 생각들을 하나로 모으고, 나와 다른 의견을 용납해주고, 소수의 의견을 품어주는 그 과정을 통해서 더 큰 풍성함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26.과정중심 - 5
십 몇 년 전, 저희가 Oklahoma에 살던 때였습니다. 하루는 한국 식품점에서 마른 미역을 샀는데, 집에 와서 포장을 열어보니 안쪽에 곰팡이가 슬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으로 바꿔 달라고 하려고 다시 그것을 가지고 갔습니다. 마침, 거기에는 그 마른 미역을 납품하였던 업체의 영업사원이 와 있었습니다.   
곰팡이가 슬은 미역을 보여 주면서 다른 것으로 바꿔 달라고 하니까, 식품점에서는 미안해 하면서 기꺼이 다른 것으로 바꿔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묻지 않았지만, 그 영업사원은 식료품들을 대량으로 유통하다 보니, 당연히 그런 제품도 섞여 있을 수 있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율은 몇 십만분의 일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곰팡이 슬은 미역은 그 영업사원에게는 그저 몇 십만분의 일에 불과하지만, 저에게는 100%였고 전부였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소수의견은 그저 적은 수에 불과하다는 것 때문에 중요하게 여기지 않거나 무시해 버리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입장을 바꿔보면, 그들에게는 그 소수의견이 전부가 될 수 있습니다.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시 하는 경우에 소수의견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아예 무시하기도 합니다. 소수의견을 장애물로 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수를 위해서 소수를 희생해야 한다고도 합니다. 오직 결과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소수의견을 들어줄 마음의 여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어떤 대단한 결과를 위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소수의견을 무시해야 할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소수의견을 들어주고 품어주는 것 자체가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27.과정중심 - 6
얼마 전까지만 해도 브라질에서 있었던 올림픽 때문에 전세계가 열광하기도 하였고, 아쉬워하기도 하였습니다. 금메달을 딴 선수는 물론이고, 그 가족과 그 나라의 국민들까지 기뻐했지만, 반대로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는 아쉬움의 눈물을 흘리면